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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구경

툼 레이더

데스페라도 2020. 11. 23. 13:03

얼마전 상훈씨는 imac을 구입했다. imac이란 컴퓨터의 일종이다. 많은 컴퓨터(거의 모든 컴퓨터)의 운영체제로 사용되는 Windows와는 다른 운영체제를 쓰는 개인용 컴퓨터다. 성능상으로 Windows 보다 별로 나을것도 없다. 상훈씨가 imac을 구입한 이유는 "그냥" 이었다. 전혀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지 그냥 사는게 꿀꿀해서 평소에 쓰던 것과는 뭔가 좀 다른 것을 써보고 싶다는 이유 뿐이었다. 같은 값이면 이쁜게 좋다고, 덜 이쁜 G4나 별로 들고 다니지도 않을 것 같은 Powerbook보다는 공간 적게 차지하고 보기에도 이쁜 imac을 구입했다. 사실 별로 쓰지도 않는다. 상훈씨가 하는 일이 주로 Windows 플랫폼에서 동작하는 소프트웨어를 작성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고, 또한 데이터베이스도 주로 Windows 기반에서 동작시키기 때문에 imac은 그저 문서 작성이나 하고 음악이나 듣고 영화나 보고 CD나 DVD를 굽는 기계로 상훈씨의 큐비클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냥 기분이 꿀꿀하다고 230만원이나 하는 컴퓨터를 구입해요?
별로 하는것도 없다면서 그러니까 애인이 없지.

상훈씨가 생각해도 imac으로 별로 하는 일이 없다. 평소에 오만것에 다 감동하는 상훈씨는, DVD를 구울 수 있다는 것에 감동하고, 17인치 와이드 TFT 모니터에 감동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은 DVD드라이브에 감동하고, 그러다가 요즘에는 그나마 감동의 횟수도 많이 줄어든 편이다. 가장 최근에 감동한 것이라면 <Matrix Reloaded>의 예고편을 Quicktime 매킨토시 버전으로 받아보고 동영상의 품질에 감동한 정도. 바로 며칠전에 공개되었던 <Matrix Revolutions>의 예고편을 Quicktime으로 받아보고 감동했다는 정도.

상훈씨도 imac을 처음 주문하고 그 다음날 택배로 받았을 때는 환장을 금하지 못했다. 우선은, 너무 이뻤기 때문이고, 매킨토시는 예전에도 써 봤었지만 예전에 쓰던 매킨토시와는 또 다른 맛이 있었고, 기계 뿐만 아니고 운영체제도 너무 이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으려는 자기 최면의 효과를 노리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맥이 없으면 죽을것 같이 환장하다가, 며칠 지나서는 평소 업무대로 Windows만 쓰다가, 급기야는 아침에 출근해서 아이맥을 켜지도 않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운영체제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래요. 적응이 되면 얼마나 훌륭한 운영체제인지 알게 될 겁니다.

상훈씨도 Mac OS X가 꽤 쓸만한 운영체제라는 데는 동의를 하지만, 사실 Windows XP정도면 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나 똑 같은 놈들이고, 운영체제가 나한테 적응을 해야지 왜 내가 운영체제한테 적응을 하느냔 말야. 이런 시건방진 운영체제 같으니라구. 사실, 매킨토시를 쓰는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하고 뭔가 구분되는 다른 훌륭한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Windows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계몽하려 하지만, 사실 그놈이 그놈 아니던가. Windows를 처음 쓰는 사람이 시작버튼에 적응 못하듯이, 매킨토시를 처음 쓰는 사람도 인터페이스에 적응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Windows를 쓰던지 매킨토시를 쓰든지 한 3개월 정도만 만지고 있으면 어느정도 쓰기 마련이고, 책보고 끙끙대지 않아도 전산에 대한 기본 지식, 전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냥 기계 만지는데 어느정도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면 자기가 쓰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쓰게 되어있게 마련이다. 상훈씨는 매킨토시에 대해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싶지 않았고, 그냥 사는게 트릿해서, 모든게 그저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기로 한 것이었다.

앗,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쩌면 그런것 같다.

▶사는게 트릿하고 꿀꿀하면 누구를 만나기가 싫어진다. 사람을 계속 만나다 보면 사람과 싸울때가 있다.
▶일하는게 트릿하고 꿀꿀하면 일하기가 싫어진다. Windows도 계속 쓰다보면 오동작을 하고 에러를 발생한다.

▶얼마간 사람 만나는게 싫다가도 본능적 욕구로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게 된다. 어쩔때는 다른 관계를 가지는 사람을 만나고 싶을때가 있다.
▶Windows를 쓰는게 싫어지다가도 배운게 도둑질이라는 이유로 계속 써야한다. 어쩔때는 다른 환경에서 작업해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큰 결심을 하고 다른 관계를 가지는 사람 (예를 들면 회사 사람들만 만나다가 여자친구를 만든다는 등의)을 만날 결심을 한다.
▶돈이 고생하지 사람이 고생하냐는 마음으로 다른 플랫폼(예를 들면 매킨토시)에서 구동되는 컴퓨터를 지른다.

여기서 갈래가 나뉜다.

1번 경우
▶만나봐야 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든지 상대가 날 거부한다든지 내가 상대를 거부한다.
▶돈들여 구입해봐야 별게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먼지가 쌓이게 방치한다.

2번 경우
▶새 사람 (예를 들면 여자친구)에 환장한다. 모든 일의 우선순위가 여자친구가 되고 다른 모든 일은 그 다음 순위가 된다.
▶새 기계에 감동하고 환장한다. 문서작성이 조금 불편하고 평소와 다르게 동작하는 것이 있어도 감수하고 새 기계를 고수한다.

1번 경우를 거친 사람이든 2번 경우를 거친 사람이든 종착역은 언제나 같다.

1번 경우를 거친 사람
▶별수 없었다고 세상을 하직할 수는 없는 문제고 또 이전으로 돌아간다. 또 사는게 트릿하고 꿀꿀해진다. 악순환이 반복된다.
▶먼지 쌓인 새 기계를 보며 중고로 팔 생각을 하게 되고 또 이전으로 돌아간다. 또 트릿해진다. 다른 기계가 나오면 눈 돌아간다.

2번 경우를 거친 사람
▶감동과 환장의 순간도 잠시 여러가지 이유(성격상의 불일치, 목구멍이 포도청 등)로 이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또 트릿하고 꿀꿀해진다.
▶새 기계에 환장하지만 역시 내 살길은 Windows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또 트릿해진다. 하지만 다른 기계가 나오면 또 눈 돌아간다.

뭐 사는게 그런거지. 다 그런거야.

상훈씨가 장황하게 아이맥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이맥 덕분에 상훈씨가 깨달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상훈씨가 평소 존경해 마지않는 구보씨의 일화와도 동일하다. 상훈씨는 어느날 아이맥의 iTunes를 이용하여 음악을 듣고 있었다. 물론 음악을 플레이 해 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맥이 랜덤하게 플레이할 파일을 선정하다가 나훈아의 <울긴 왜 울어>를 재생하였는데, 상훈씨는 그 노래를 듣다가 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야 만 것이었다.

과연 나훈아는 당대 최고의 가객이었구나.
역시 당대 최고의 여배우와 살림을 차릴만도 하구나.

상훈씨가 악! 하고 고함을 지르고 만 부분은 한 구절이었다. "어차피 인생이란 연극이 아니더냐". 그 소리는 상훈씨에게 어떤 계시였다. 나훈아는 단순히 멜로디에 맞추어 가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깨달음이라고 할까. 나훈아는 정말 인생이 연극임을 깨닿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세상 사는게 어차피 연극이 아니더냐. 사는게, 좋은거 좋다하고 싫은거 싫다하며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싫어도 좋은척, 좋아도 싫은 척, 듣기 싫어도 집중해 들어주는 척, 말 안되는 소리를 해도 맞장구 쳐 주는척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렇구나. 상훈씨는 그 짧은 순간에 인생을 사는 법에 대한 정석을 습득하고야 만 것이다. 물론 그런 경지에 이르려면 수 없이 많은 수행과 고통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게 정답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 상훈씨는 그때 비로소 아이맥을 구입한 보람을 느끼고야 만 것이다.

참 좋은 것 깨달으셨네요.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비꼬아도 할 수 없다. 상훈씨에게 이건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상훈씨는 인생이 연극임이 깨닿고야 말있다. 마치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처럼. 상훈씨는 연극 배우가 되기로 했다. 고등학생때의 꿈이 영화 감독이었던 만큼 인생을 사는 것을 연극처럼 살기로 했다. 

각설하고, 상훈씨는 얼마전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툼 레이더 2 : 판도라의 상자>였다.

영화는 별게 없었다. 게임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여성 캐릭터라는 라라 크로포드가 인디아나 존스 흉내를 내다가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 상훈씨는 영화를 보다가 황당해지기 시작했다. 저건 인디아나 존스가 아니고 제임스 본드잖아. 상훈씨는 <터미네이터 3 : 기계들의 봉기>를 보다가 앗! 헐크다!를 외친적이 있다. 아마 옆에 아무도 없었으면 애궂은 남자 둘이 죽고 별로 살아날 길이 없어 보이는 지하동굴에서 상어를 타고 탈출하는 장면이나 개연성 없어 보이는 임달화를 작살내는 장면에서 앗! 본드다! 하고 외치고 말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간에 영화는 계속된다. CGV에 불이 나지 않는 이상 영화는 계속된다. 아니 불이 나도 계속될지 모르는 일이다. 라라 크로포드는 남의 집 애들 TV를 못 보게 해 가면서 까지 정의를 수호하려 하고, <Sum of All Pears>에서 멋진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라이스 박사는 어쨌든 돈을 벌려한다.

뭐 그런거지 뭘 더 기대 하겠어.

상훈씨가 감동받은 것이 있다면 크로포드의 전 애인인 테리의 팔목이 부러져도 키스를 하고야 말겠다는 마음가짐 정도? 인디아나 존스 풍의 영화가 난데없이 007 영화가 되더니 급기야 반지의 제왕이 되고 결말에는 네쇼널 지오그래픽이 되고야 마는 이런 영화를 상훈씨가 보고 뭐라고 이야기 해야 할까. 젠장? 제기랄? 이럴수가? 씨바?

CGV를 나오는 상훈씨 귓가에는 노래가 들렸다. 어차피 인생이란 연극이 아니더냐. 하물며 영화야 말할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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